도쿠가와 나리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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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미토 번의 제9대 번주로, 미토학을 배우고 번정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아들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쇼군 후계자로 만들려 노력했으나,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가택 연금 중 사망했다. 1800년에 태어나 1860년에 사망했으며, 서예, 군사 훈련, 번교 설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서양 문물에 관심을 보였으며, 막말 시기 도쿠가와 가문에서 카리스마와 행동력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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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나리아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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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도쿠가와 나리아키 |
일본어 이름 | 徳川 斉昭 |
로마자 표기 | Tokugawa Nariaki |
다른 이름 | 호사부로, 게이조, 마쓰다이라 노리노리, 도쿠가와 나리아키 |
시호 | 렬공 |
신호 | 오시타케오쿠니노미타테노미코토, 나리아키라노미코토 |
출생일 | 1800년 4월 4일 |
사망일 | 1860년 9월 29일 |
국적 | 일본 |
관직 | |
미토 번주 | 제9대 미토 번주 |
재임 시작 | 1829년 |
재임 종료 | 1844년 |
이전 | 도쿠가와 나리노부 |
다음 | 도쿠가와 요시아쓰 |
관위 | 종3위・좌근위권중장 겸 좌위문독, 참의, 권중납언, 증 종2위・권대납언, 증 종1위, 증 정1위 |
막부 | 에도 막부: 해방 참여, 군제 개혁 참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도쿠가와 하루토시 |
어머니 | 도야마도노 |
양아버지 | 도쿠가와 나리노부 |
양어머니 | 미네히메 |
배우자 | 아리스가와 요시코 (1804–1893) |
자녀 | 도쿠가와 요시노부 도쿠가와 아키타케 마쓰다이라 다다카즈 마쓰다이라 노부노리 외 다수 |
기타 정보 | |
묘소 | 즈이류산 |
2. 일생
1800년 3월 11일 미토 번 제7대 번주 도쿠가와 하루토시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문하에서 미토가쿠[39]을 배웠다.
1829년 맏형인 미토 번 제8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노부의 뒤를 이어 제9대 번주가 되었다. 아들인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를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나, 다이로인 이이 나오스케가 일으킨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가택 연금 중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나리아키는 번정개혁에 성공한 막말의 명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장군 계승 문제에서 로주 이이 나오스케와의 정쟁에 패하여 영구 칩거하게 되었고, 그대로 사망하였다.
만엔(万延) 원년(1860년) 8월 15일, 칩거 처분이 풀리지 않은 채 미토에서 급사하였다. 향년 61세(만 60세). 추석 보름달을 감상하는 잔치가 열리고 있었는데, 자정 무렵 화장실에 간 후 쓰러졌다고 전해진다. 40대부터 협심증 증상이 나타나 만성 질환이 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추정된다.[18] 사쿠라다몬 외의 변(桜田門外の変) 직후였기 때문에 히코네 번(彦根藩)의 사무라이에게 암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지만, 당시 미토 번(水戸藩)의 기록에는 암살을 암시하는 내용이 없다.
2. 1. 가독 상속
1829년 맏형인 미토 번 제8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노부의 뒤를 이어 제9대 번주가 되었다.[1] 분세이(文政) 12년(1829년), 나리노부(제수)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중병에 걸렸다. 다이묘 승진을 모의하는 오츠케 가로(御附家老) 나카야마 신모리(中山信守) 등을 중심으로 한 문벌파에서 오스미나카(御簾中) 미네히메(峰姫)의 이복동생인 도쿠가와 제쿄(恒之丞, 나리아키의 의붓형제)를 양자로 맞이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나리아키를 지지하는 학자와 하급 무사 40명 남짓이 무단으로 에도에 올라가 진정하는 등 소란이 일자, 나리노부가 죽은 뒤 유서가 발견되었고, 나리아키가 가독(家督)을 계승했다.2. 2. 번정 개혁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1829년 미토 번의 제9대 번주가 된 후, 번의 재정과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번정 개혁을 추진했다.나리아키는 아이자와 세이시사이에게서 미토학을 배웠으며, 이는 그의 개혁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39] 그는 1841년 번교인 고도칸(弘道館)을 설립하고,[7] 문벌 중심의 기존 세력을 억누르고 능력 있는 인재를 폭넓게 등용했다. 도다 다이다유(戸田忠太夫), 후지타 토코(藤田東湖), 안지마 타이토(安島帯刀), 아이자와 세이시사이, 다케다 고운사이(武田耕雲斎), 아오야마 세쓰사이(青山拙斎) 등이 등용되어 번정 개혁을 이끌었다.
나리아키의 개혁은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의 덴포 개혁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된다. 1837년, 나리아키는 다음과 같은 개혁 목표를 제시했다.
- 경계의 의(経界の義): 토지 측량(전령검지(全領検地)) 실시
- 토착의 의(土着の義): 번사(藩士)들의 토착화
- 학교의 의(学校の義): 번교 고도칸(弘道館) 및 향교(郷校) 건설
- 총교대의 의(総交代の義): 에도 정부제(定府制) 폐지
또한, 나리아키는 '추조수(追鳥狩)'라는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농촌 구제를 위해 비에구라(稗倉)를 설치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서양 근대 병기의 국산화를 추진하고, 에조지(蝦夷地) 개척과 대형 선박 건조 해금을 막부에 제안하는 등 적극적인 개혁 의지를 보였다.
나리아키는 종교적인 측면에서 사찰(寺院)의 종(釣鐘)과 불상(仏像)을 몰수하여 대포(大砲) 재료로 사용하고, 길가의 지장(地蔵)을 철거하는 등 불교(仏教) 억압 정책을 펼쳤다.[12] 이는 메이지(明治) 시대 초기의 신불분리(神仏分離)와 폐불훼석(廃仏毀釈)의 선구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또한 마을마다 신사(神社)를 설치하고, 승려(僧侶)가 담당하던 민중 관리 제도를 신관(神官)에게 이관하는 등 신도(神道) 중심 정책을 추진했다.
1842년에는 일본 3대 명원(日本三名園) 중 하나인 가이라쿠엔(偕楽園)을 조성했다.[13][14]
나리아키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애민(愛民) 정신을 강조했지만,[24] 농민들에게는 학문보다 농사에 힘쓰는 것을 강조하며 교육의 필요성을 낮게 평가했다.[25] 그는 농본주의를 주장하며 농민과 곡식에 대한 감사함을 강조했지만, 농민의 모습을 한 동상을 만들게 하고 식사 전에 밥 한 술을 올리는 등 다소 특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26][24]
나리아키는 검소한 생활을 강조하며 막부로부터 받던 원조금을 반납하고, 가신들에게도 검약을 강조했다.[30]
2. 3. 막정 참여와 실각
1853년 6월, 매슈 페리의 우라가 항해 당시, 로주(老中) 수좌 아베 마사히로의 요청으로 해방참여(海防参与)로서 막정(幕政)에 관여하였다. 미토가쿠(水戶學)의 입장에서 나리아키는 페리 암살을 포함한 강경한 양이론(攘夷論)을 주장하였다.[15] 이때 에도 방비를 위해 대포 74문을 주조하여 탄약과 함께 막부에 헌상하였고, 에도의 이시카와지마(도쿄도 주오구 쓰키지)에서 건조한 서양식 군함 아사히마루(旭日丸)를 막부에 헌납하였다. 안세이(安政) 2년(1855년)에는 나카미나토 반사로(反射炉)가 완성되어 철제 대포를 주조하였다.[16]1855년 군제개혁참여(軍制改革参与) 자리에 올랐으나, 같은 해 안세이 대지진으로 후지타 도코와 도다 주다유 등의 참모들을 잃었다. 이듬해인 1857년 아베 마사히로가 사망하고, 후임으로 호리타 마사무쓰가 로주 수좌가 되자, 그의 개국론(開国論)에 나리아키는 더욱 반대하여 개국을 추진하는 히코네번 번주 이이 나오스케와 대립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사다의 쇼군 계승 문제 또한 이이 나오스케 등과의 쟁점이 되었다. 기슈번 번주 도쿠가와 이에모치(도쿠가와 요시후쿠)를 지지하여 난키파(南紀派)를 형성한 이이파에 대항하여, 잇카와파(一橋派)는 나리아키의 친자인 잇카와 도쿠가와가 당주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지하였다. 나리아키는 이 싸움에서 패배하였고, 이이 나오스케는 1858년 다이로(大老) 자리에 올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독단으로 조인하고 요시후쿠(이에모치)를 쇼군으로 삼았다.
1858년 6월 24일, 나리아키는 도쿠가와 요시아쓰와 오와리번 번주 도쿠가와 요시카쓰를 동행하여 에도성에 무단으로 입성하여 이이 다이로를 질책하였다. 그러나 다음 달 7월, 이이 나오스케로부터 미토번 에도 저택에서 금족령을 받았고,[17] 막부 중추에서 배제되었다.
고메이 천황에 의한 무오밀칙이 미토번에 내려지자, 격분한 이이 나오스케는 1859년 나리아키에게 영구 칩거(永蟄居) 명령을 내렸다. 나리아키는 미토로 이송되면서 사실상 정치 생명을 잃게 되었다(안세이 대옥 참조).
3. 가족
徳川 斉昭|도쿠가와 나리아키일본어는 많은 자녀를 두었는데, 대부분 다른 집안의 양자가 되거나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 다음은 그의 자녀들이다.
부인/측실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아리스가와 요시코 | 장남 도쿠가와 요시아쓰 | 1832년 - 1868년 | |
차남 지로마로 | 1833년 - 1834년 | ||
5녀 미히메 | 1835년 - 1835년 | ||
7남 도쿠가와 요시노부 | 1837년 - 1913년 | ||
하리가와 여인 | 장녀 마사히메 | 1822년 - 1839년 | |
차녀 이로모토히메 | 1825년 - 1826년 | ||
삼녀 이와이히메 | 1827년 - 1853년 | 야마노베 요시마사와 결혼 | |
오나오노 카타 | 4녀 히로히메 | 1834년 - 1835년 | |
4남 시로마로 | 1835년 - 1836년 | ||
7녀 요히메 | 1837년 - 1843년 | ||
8남 마쓰다이라 나오요시 | 1839년 - 1862년 | ||
9녀 이치요히메 | 1840년 - 1843년 | ||
10남 마쓰다이라 다케아키라 | 1842년 - 1882년 | 하마다번 | |
13남 요사마로 | 1844년 - 1844년 | ||
사다코 | 3남 사부로마로 | 1835년 - 1837년 | |
6녀 마쓰히메 | 1836년 - 1903년 | 난부 도시히사와 결혼 | |
5남 이케다 요시나리 | 1837년 - 1877년 | 돗토리번 | |
9남 이케다 모치마사 | 1839년 - 1899년 | 오카야마번 | |
10녀 타카코 | 1841년 - 1869년 | 다테 요시쿠니와 결혼 | |
12남 요니마로 | 1844년 - 1844년 | ||
야나기하라 여인 | 6남 로쿠로마로 | 1837년 - 1838년 | |
도시코 | 12녀 세이히메 | 1843년 - 1844년 | |
11남 기쓰레가와 쓰나우지 | 1844년 - 1874년 | 기쓰레가와번 | |
무쓰코 | 14남 마쓰다이라 아키쿠니 | 1849년 - 1864년 | |
11녀 도쿠가와 사다코 | 1850년 - 1872년 | 아리스가와 다루히토 친왕과 결혼 | |
17남 쓰치야 시게나오 | 1854년 - 1904년 | 쓰치우라번 | |
18남 도쿠가와 아키타케 | 1853년 - 1910년 | ||
20남 다쓰모로 | 1856년 - 1858년 | ||
22남 마쓰다이라 요리유키 | 1858년 - 1873년 | 모리야마번 | |
도쿠코 | 15남 요고마로 | 1849년 - 1849년 | |
16남 마쓰다이라 타다카즈 | 1851년 - 1917년 | ||
13녀 아이히메 | 1852년 - 1914년 | 이누에 마사요리와 결혼 | |
21남 이치마루 | 1856년 - 1856년 | ||
미치코 | 14녀 히사히메 | 1853년 - 1853년 | |
에쓰코 | 19남 마쓰다이라 노부노리 | 1855년 - 1891년 | |
15녀 야스히메 | 1857년 - 1859년 | ||
16녀 마사히메 | 1858년 - 1873년 |
나리아키는 예의범절에 엄격하여 어린 시절 잠버릇이 나빴던 일곱째 아들 요시노부가 잘 때 베개 양옆에 면도칼을 세워놓고 재웠다는 일화가 있다.[20][21][22]
총애하던 측실의 지위를 높여주자 측실이 돈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나리아키가 이유를 묻자 측실은 지위가 높아져 의복 비용이 더 필요하다고 답했다. 나리아키는 이를 분별없는 행동이라 꾸짖고 그 후로 측실과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23]
4. 평가 및 논란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그는 시호인 '열공(烈公)'처럼 거침없는 성격으로 난세를 헤쳐나갔으며, 막말 시대 도쿠가와 가문에서 보기 드문 카리스마와 행동력을 겸비했다.[19] 그러나 여색을 밝히는 등 사생활 문제로 비판받기도 했으며, 오오쿠의 여성들은 그를 싫어하여 아들 요시노부의 쇼군 계승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나리아키는 미토학의 영향으로 개국에 반대했지만, 서양 문물에는 관심을 보였다.[19] 매슈 페리에게서 받은 콜트 권총을 번에서 양산하기도 했으며, 마쓰다이라 하루타케에게는 개국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24] 강조했지만, 농민에게 교육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등[25] 한계점도 보였다. 농본주의를 내세워 농민을 위하는 듯했지만, 결국 사무라이를 위한 존재로만 여겼다는 비판도 있다.
4. 1. 긍정적 평가
시호인 열공(烈公)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거침없는 성격으로 난세를 헤쳐나간 인물이었다.[19] 막말(幕末) 시기 인재가 부족했던 도쿠가와 가문에서 카리스마와 행동력을 겸비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9] 그의 죽음은 막부에 큰 타격이었으며, 이후 미토 번은 내분에 휩싸였고 그가 발탁한 인재들도 모두 몰락하게 된다.[19]나리아키는 미토학파의 영향을 받아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서양 문물에는 큰 관심을 보였다.[19] 매슈 페리에게서 받은 콜트 권총을 자신의 번에서 양산하기도 했다.[19] 또한, 후쿠이 번(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하루타케에게 편지를 보내, "나는 양이파의 두목으로 여겨지고 있어 개국을 주장할 수 없으니, 귀공들이 개국을 추진해 달라"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농본주의를 주창하며 농민을 중시했던 나리아키는 농민과 곡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농민 모습을 한 동상을 만들게 했다.[26] 식사 전에는 농민 인형 모자에 밥 한 술을 올리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고 한다.[26] 이러한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굽지 않은 도자기나 목각 "농민 인형"이 만들어져 미토시의 향토 장난감이 되었다.[26] 그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24] 검소함을 강조하며 막부로부터 받던 원조금을 반납하기도 했다.[30]
4. 2. 부정적 평가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거침없는 성격으로 난세를 헤쳐나간 인물이었지만,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여색을 밝혀 형수인 미네히메(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딸)의 시녀 가라하시(원래는 오오쿠의 시녀였다)까지 측실로 삼을 정도였다. 이 일로 오오쿠의 여성들은 그를 싫어했고, 아들 요시노부의 쇼군 계승에도 어려움을 주었다고 한다. 나리아키는 37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대부분 다른 집안의 양자가 되거나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갔다.[17]미토학의 영향을 받아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서양 문물에는 흥미를 보였다.[19] 그는 매슈 페리에게서 받은 콜트 권총을 자신의 번에서 양산하기도 했다. 또한, 사실상 개국만이 유일한 방법이지만, 자신은 양이파(攘夷派)의 두목으로 여겨지고 있어 개국을 주장할 수 없으니 다른 이들이 개국을 추진해 달라는 편지를 마쓰다이라 하루타케에게 보내기도 했다.
막말 시기 인재가 부족했던 도쿠가와 가문에서 카리스마와 행동력을 겸비한 유일한 인물이었기에 그의 죽음은 막부의 큰 타격이었다.[19] 그가 죽은 후 미토 번은 내분에 휩싸였고, 그가 발굴한 인재들도 모두 자멸하게 되었다.
나리아키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24]이라며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강조했지만, 한편으로는 “농민이 학문을 배우는 것은 농사일을 방해한다”며 교육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농민은 욕심 없이 농사에 힘쓰고 소박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25] 이는 농민을 사무라이를 위한 존재로만 여기는 전제 지배자의 자비로 해석될 수 있다.
농본주의를 주장하며 농민과 곡식에 대한 감사함을 강조하고 농민의 모습을 한 동상을 만들게 하기도 했다. 식사 전에는 농민 인형 모자에 밥 한 술을 올리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26][24] 이러한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굽지 않은 도자기나 목각으로 만든 “농민 인형”이 미토시의 향토 장난감이 되었다.[26]
5. 기타
- 시호는 烈公(열공)으로, 거침없는 성격으로 난세를 헤쳐나간 인물이었다.[19]
- 여색을 밝혀 많은 여성을 측실로 삼았고, 이로 인해 오오쿠의 여성들은 그를 싫어했다. 이는 아들 요시노부의 쇼군 계승에도 어려움을 주었다. 슬하에 37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대부분 다른 집안의 양자가 되거나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보냈다.
- 미토학의 영향으로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서양 문물에는 흥미를 보였다.[19] 매슈 페리에게서 받은 콜트 권총을 자번에서 양산하기도 했다.[19]
-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하루타케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양이파의 두목이라 개국을 주장할 수 없으니 다른 이들이 개국을 추진해 달라고 부탁했다.
- 어린 시절 잠버릇이 나빴던 아들 요시히토(慶喜)가 잘 때 베개 양옆에 면도칼을 세워놓고 재웠을 정도로 예의범절에 엄격했다.
- 총애하던 측실이 지위가 높아져 의복 비용이 더 필요하다고 하자, “그럴 필요 없다. 지금까지 입던 옷으로 내 앞에서 일하라”라고 말하며, 이후 그 측실과의 면회를 허락하지 않았다.[23]
-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애민전일”[24]을 중시하면서도, 농민이 학문을 배우는 것은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교육을 불필요하게 생각했다.[25]
- 농본주의를 주장하며 농민과 곡식에 대한 감사로 농민 모습을 한 동상을 만들게 하고, 식사 전에 농민 인형 모자에 밥 한 술을 올리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26][24]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는 굽지 않은 도자기나 목각 “농민 인형”이 미토시의 향토 장난감이 되었다.[26]
- 무술에 능하여 신발류포술, 조산류나기나타술을 창시하고 고도칸에서 지도하게 했다.[31]
- 전차의 일종인 안신차(安神車)를 만들게 했으며, 현재 미토 도쇼궁에 그 일부가 남아 있다.[32]
- 소상팔경을 본떠 미토 번 영내의 경승지 ‘수도팔경’을 선정했다.[33]
- 야요이(弥生)라는 지명은 그가 지은 노래비의 서두 구절에서 유래했으며, 간접적으로 야요이 시대의 이름을 지은 사람이 되었다.[34]
- 사후 출판된 저서로는 『弘道館記』(1937), 『明君一斑抄』(1910–1911) 등이 있다.
- 육식을 즐겨 오미규를 선물 받고 감사의 편지를 썼다.[35]
- 자신의 정원에서 젖소를 기르며 건강을 위해 우유를 유리 그릇에 담아 마셨으며, 저서 『채식록』에는 우유가 정력제라는 설명이 있다.[36]


5. 1. 인물·일화
- 시호인 烈公(열공)에서도 짐작이 가지만 거침없는 성격으로 난세를 헤쳐나가 살아남은 인물이었다.[19]
- 나리아키를 싫어하는 이들도 많았다. 여색을 밝혀 형수인 미네히메(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딸)의 시녀인 가라하시(원래는 오오쿠의 시녀였다)까지 측실로 삼을 정도였다. 이 일의 영향으로 오오쿠의 여성들은 그를 싫어했고, 아들인 요시노부의 쇼군 계승에도 어려움을 주었다고 한다. 나리아키는 37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대부분 다른 집안의 양자가 되거나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보냈다.
- 미토학파의 영향을 받아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서양 문물에는 흥미를 보였다고 한다.[19]
- 인재가 부족했던 막말의 도쿠가와 가문에서 카리스마와 행동력을 겸비한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은 막부의 큰 타격이었고, 그가 죽은 후 미토 번에는 내분이 일어나고 그가 발굴해낸 인재도 모두 자멸하게 된다.[19]
유소기부터 미토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개국에는 맹렬히 반대했지만, 매슈 페리로부터 전달받은 콜트 권총을 자번(自藩)에서 양산하는 등, 서양의 물품에 대해서는 대단히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19] 에치젠 번주 마쓰다이라 하루타케에게, 사실상 개국밖에 방법이 없지만 나는 攘夷(양이)파의 두목이자 攘夷파 사람들에게 그렇게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개국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귀공(貴君)들이 개국을 도모해 주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썼다.
예의범절에 엄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 잠버릇이 나빴던 일곱째 아들 요시히토(慶喜)가 잘 때 베개 양옆에 면도칼(剃刀)을 세워놓고 재웠다.
총애하던 측실의 지위를 높여 주었더니, 그 측실은 크게 기뻐하며 돈을 요구했다. 나리아키는 이유를 물었고, 측실은 “이전보다 지위가 높아졌으므로 의복에 드는 비용이 많아졌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리아키는 “그럴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입던 옷으로 내 앞에서 일하라”고 말했지만, 측실은 “그렇게 하면 체면이 유지되지 않고 봉사를 다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리아키는 격노하여 “이런 때에 돈을 요구하다니 어찌 이리도 분별이 없느냐. 봉사를 다할 수 없다면 출사는 불필요하다”라고 말하고 나가 버렸다. 그 후로 나리아키는 그 측실과의 접견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23]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애민전일”[24]을 진심으로 마음에 새기면서도, “농민이 학문을 배우는 것은 (중략) 농사짓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다”라 하여 교육을 불필요하게 여기고, 다만 “욕심 없이 농사를 부지런히 짓고, 자식을 기르는 도리도 다하며, 항상 소박한 옷을 입고, 저장도 부족하지 않으면” 좋다고 여겼다.[25]
번정 개혁에 있어서 농본주의를 주창하면서, 농민과 곡식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농민의 모습을 한 동상을 만들게 하고,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농민 인형의 모자에 밥 한 술을 올리는 것을 습관으로 삼았다.[26][24] 메이지 말기부터 굽지 않은 도자기나 목각의 “농민 인형”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미토시의 향토 장난감이 되었다.[26]
무술에 능숙하여 스스로 신발류포술, 조산류나기나타술을 창시하여 고도칸에서 지도하게 했다.[31]
5. 2. 안신차(安神車)
나리아키는 전차의 일종인 안신차(安神車)를 만들게 했다.[32] 현재 미토 도쇼궁에 그 일부가 남아 있다.[32]5. 3. 문화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미토학파의 영향을 받아 개국에는 반대했지만, 서양 문물에는 흥미를 보였다.[3] 1853년에 "일본, 서양인을 거부하라"는 문서를 통해 일본이 세계와 고립되어야 하는 10가지 이유를 제시하며 서양과의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구화에 대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고쿠가쿠(Kokugaku) 학파의 영향을 받아 일본의 "국민 정신" 재활성화를 추구했다.[3] 히라타 아쓰타네(Hirata Atsutane)의 제자 오쿠니 타카마사(Ōkuni Takamasa)는 나리아키에게 의례와 기술을 결합하여 일본 국경을 보호하고 제국으로 확장하도록 설득했고, 이는 국가 신토(State Shinto) 발전과 메이지 유신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3]나리아키는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본떠 미토 번 영내의 경승지 ‘수도팔경(水戸八景)’을 선정했다.[33] 또한, 그가 지은 노래를 새긴 노래비의 서두 구절에서 야요이(弥生)라는 지명이 유래하여, 간접적으로 야요이 시대의 이름을 지은 사람이 되었다.[34]
사후 출판된 저서로는 『弘道館記』(1937), 『明君一斑抄』(1910–1911) 등이 있다.
5. 4. 음식
도쿠가와 나리아키는 육식을 즐겨 먹었으며, 히코네번에서 오미규를 선물 받았을 때 감사의 편지를 썼다.[35]또한, 자신의 정원에서 젖소를 기르며 건강을 위해 우유를 유리 그릇에 담아 마셨다. 나리아키의 저서 『채식록』에는 우유가 정력제라는 설명이 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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